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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 Twinings - Lady Grey (Milk tea)

오전 내내 하늘이 잿빛이더니 오후가 좀 지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. 밤이 되면 잠잠해질까 싶었지만 빗발은 더욱 거세지기만 할 뿐이다. 배도 못 채우고 회사가 끝나자마자 학교에 가서 세 시간 짜리 수업을 듣고 왔더니 완전히 빈사 직전, 꼬르륵 소리가 절로 난다. 조금이라도 배를 채워야 편히 자겠다는 마음에 떠올린 건 후후 불어마시는 밀크티. 

바닐라 가향티를 마실까, 카라멜 가향티를 마실까 고민하던 중에 문득 트와이닝스의 레이디 그레이가 눈에 들어왔다. 성은 '그레이'지만 맛은 전혀 '그레이'하지 않은 상큼한 차다. 그야말로 이런 우중충한 날씨에 딱 제격이다. 게다가 레이디 그레이에 들어 있는 수레국화는 피로 회복에 좋다고 하지 않는가. 다만 레이디 그레이로는 밀크티를 마셔본 적이 전혀 없어서 조금 걱정은 되었다. 과연 상큼함과 우유가 잘 어울릴까?

틴은 뚜껑을 열면 향이 확 퍼지는데 티백은 꺼내도 향이 별로 안 난다. 예열해 놓은 컵에 뜨신 물을 반쯤 담고 레이디 그레이를 5분 정도 우렸다. 레이디 그레이가 물에 우러나니 그제야 향도 우러나기 시작한다. 역시 우중충함 따위는 저 우주 멀리로 날려버리는 사랑스러운 향이다. 그 동안 나는 세수하고 발 닦고 우유 데우고! 진하게 우려진 홍차에 라빠르쉐를 한 알 넣고, 뜨끈뜨끈한 우유를 붓고, 거품을 올렸다.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먹음직스러운 레이디 그레이 밀크티 완성. 

  음, 아…….

왠지 오렌지 우유가 시중에 판매된다면 비슷한 맛이 날 듯하다. 복잡 미묘한 심정이다. 애초부터 레이디 그레이를 선택해 놓고 구수하고 달달한 밀크티를 상상하면 안 되는 거지만, 내 예상과 너무 어긋났다. 레이디 그레이 특유의 향이 우유와 잘 안 어우러진달까. 생각만큼 진하게 안 우려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. 레이디 그레이는 순한 편이니까 말이다. 

요 며칠 동안 밀크티 실패 아닌 실패를 겪으면서 나한테는 순하고 부드러운 영국식 밀크티보다 진한 로열밀크티가 더 잘 맞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. 레이디 그레이도 로열밀크티로 만들어 마시면 좀 괜찮을까나. 오늘이 잊혀질 때 즈음 한 번 또 시도해 봐야겠다. 흐흐. 그래도 뜨뜻한 걸로 배가 좀 차서 좋다. 이제 푹 자야지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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